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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의 성공심리학

커피 알고 마시자 노예들의 검은 눈물, 검은 황금 커피 역사 보스턴 차 사건

by 슬리피 2023.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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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의 검은 눈물,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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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초 사탕수수 대체 작물로 사탕무가 대두하면서 신대륙 작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했던 사탕수수의 가격이 곤두박질쳤다. 반면 유럽의 커피 수요는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각국은 당연히 커피 생산과 공급을 늘려갔다.

1773년 12월 6일 보스턴 차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커피 소비가 늘기 시작했고, 1812년 영미전쟁으로 차 공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자 커피는 미국의 국민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 미국이 커피를 비롯한 프랑스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한몫했다.

미국의 커피 소비 증가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브라질이었다. 당시 브라질은 커피 재배를 농업이라기보다는 산업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시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리우데자네이루 근교의 파라이바강 유역에는 거대한 커피농장이 생겨났으며, 부유한 농장주들은 수많은 노예를 부리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해 갔다. 1920년에 이르러 브라질은 세계 커피 공급량의 80%를 담당하게 되었다. 지금은 약 35%를 차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노예 이용, 불평등, 자본주의적 방식 등은 브라질뿐만 아니라 다른 커피 재배국에서도 나타났다. '검은 황금'이라고도 불린 커피의 19~20세기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유럽이, 나중에는 미국이 경제력을 동원해 커피생산국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마음대로 주물러왔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커피 생산국들은 커피 생산이라는 족쇄에 묶여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부유한 서구 국가들의 요구에 맞춰 커피를 재배해야 했다. 커피 생산은 아프리카 내 영국이나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많은 국가들의 발전을 제한했다. 일례로 케냐와 말라위 정부는 자국 내 커피농장에 대한 소유권이나 통제권을 주장할 수 없었으며, 벨기에의 통치하에 있던 중부 아프리카 국가 부룬디에서는 1933년부터 모든 농부가 의무적으로 최소 50그루 이상의 커피나무를 재배해야 했다.

커피나무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는 아래글을 참고하면 된다.

검은 황금 커피에 숨겨진 검은 눈물, 루이 14세 커피나무 콜롬비아 브라질 커피 원두의 시작

검은 황금 커피 유럽의 커피 소비량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18세기 초가 되자 유럽 국가들은 수입(아랍) 커피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행

pearl5004.tistory.com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커피 생산국이 식민지배를 벗어났지만 시민봉기, 사회변동, 경제불황, 정치불안정, 외국의 통상금지 조치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커피녹병과 시장불안정, 기근까지 덮쳤다. 식민통치가 끝난 후 새롭게 들어선 정부도 딱히 이전 정부에 비해 나을 것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결국 수많은 비극이 발생했다. 커피농장이 들어서는 지역에 살던 과테말라의 원주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으며, 손바닥만 한 경작지에서 농사를 짓던 엘살바도르 농부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땅을 빼앗겨야 했다. 모두 커피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커피녹병은 커피 잎에 번식 팔이 균이다. 전염성이 강해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다.

물론 온통 비극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커피 재배의 역사에서 행복하기만 한 성공담을 찾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중미의 코스타리카는 모범적인 커피 생산국으로 꼽히는데, 이는 약 200년간 국민들한테 커피 경작을 장려해 온 정부의 덕도 있다. 코스타리카 정부는 한때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커피 종자와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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